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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번 필사하기[7]

명예로운 치욕

 


엘리엇의 ‘황무지’에서 유래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시구가 절로 떠오르는 시절이 아닐까 싶다.
이 관용구는 원래 시의 맥락과는 무관하게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데 어쨌거나 수상한 시절임에는 틀림없고 그런
시절을 견디는 일이 잔인하다는 공통된 정서가 투영되는 듯하다.

나 역시 그렇다. 해마다 4월이면 이 시구를 떠올리기는 했지만 올해는 예전처럼 반어적이거나 다의적인 용법으로는 아니다.
그러나 또한 새삼 이 시와 얽힌 일화가 떠오른다. 문학사의 유명한 일화다. 엘리엇의 스승인 에즈라 파운드도
훌륭한 시인이지만 제자만큼은 아니었다. 스승은 제자를 알아보았고 제자 또한 스승의 비판과 충고를 겸허히 수용할 줄 알았다.
‘황무지’라는 문학사에 획을 그은 대작품은 그렇게 탄생했다. 시의 초고를 스승에게 보여준 엘리엇도 원고의
반을 뭉텅 잘라낼 만큼 무지막지하게 손을 댈 거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승에게 건네받은 자신의 시를 보면서 엘리엇은 얼마나 처참한 심정이었을까.
그러나 엘리엇은 스승의 견해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엘리엇과 같은 시인이 자기검열에 불철저했으리라 믿을 수는 없다.
또한 그만큼 자기 견해가 확고하지 않은 시인이라고 믿을 이유도 없다. 엘리엇이 시인으로 보여준 확고함은 그의 단호한
자기주장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의 겸허함과 진실을 알아보고 인정하는 용기에 있다. 만약 엘리엇이 초고를 고집했더라면
우리가 아는 ‘황무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시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흔한 시인이 아니라 참된 용기를
지닌 시인이었기에 더욱 가능한 일이었다. 한 편의 위대한 시를 출산하기 위해 시인이 겪어야 했던 명예로운 치욕이
우리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치욕이다.

 

- 손홍규, <다정한 편견>, 168~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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